ARTIST STATEMENT
나는 이미 한 신체의 시간을 통과한 재료들과 작업한다 — 짚, 거즈, 찢고 물들인 천, 헌 옷, 종이, 그리고 주조한 청동. 그것들은 통과 중인 상태로 내게 온다. 끝나지도,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은 채로. 나는 그것들을 긁고, 비틀고, 다시 엮으며, 형태가 무너질지 버틸지 결정되는 경계에서 작업한다. 나는 이 경계를 임계점(Critical Point)이라 부른다. 나의 작업은 상실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을 짊어진다 — 꽉 쥐어졌던 것이 마침내 스스로를 놓아주는 법을 배울 때까지.
나는 오래전부터 어떤 물질들에 끌렸다: 투명하면서도 탄력 있는 것들; 찢어질 때까지 늘어나 그 안의 실들을 드러내는 것들; 느슨해지고 구멍 났지만 결코 버려지지 않은 것들. 몸을 닦는 데 쓰였던 빛바랜 천. 오래 입어 늘어난 소매. 한때 가까웠던 몸들의 옅은 마찰을 아직 간직한 옷 한 벌 — 나일론의 스침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았던 영혼들의 희미한 소리. 가느다란 빛이 닿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들. 그 안에서 나는 이름 붙일 수 없던 무언가를 알아보았다: 더는 곱씹을 분노도, 회한도, 원망도, 쓰라림도 없는 — 다만 끊임없이 무너지고 다시 생겨나는, 하루 전체의 평범한 무게로 두꺼운 부재만이 있었다. 이 재료들이 내게 왔을 때, 나는 그 안에서 익숙한 무언가를 알아보았다 — 그것들은 부재를 닮아 있었다. 그것들은 누군가가 남기고 간 것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누군가가 살았다는 증거로, 그리고 그 사람이 내 기억 속에서 계속 버티는 자리로 여기게 되었다. 몸이 사라진 뒤에도, 물질은 여전히 그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가 이 부재를 알아보는 눈은 한 곳에서 오지 않았다. 한국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살고 일하는 나의 이중적 위치는 이 작업에 우연히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그 구조적 조건이다. 두 곳 사이에 살며 나는 뜻밖의 것을 듣게 되었다. 한 사회가 자신의 죽은 자를 거두는 언어가, 국경과 무관하게 서로 닮아 있다는 것을. 연고 없는 죽음은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가장 적은 손길로 닫힌다. 그러니 나의 이중적 위치는 양식의 문제이기 이전에, 같은 적막을 양쪽에서 동시에 듣는 자리이기도 하다. 나의 실천 안에서 동아시아의 절제와 서구의 물질성은 서로의 알리바이가 되지 않는다. 건너감 자체가 나의 작업이 서 있는 자리다; 그것은 내가 쥠과 놓음 사이의 간격을 다루는 방식을 빚는다 — 서구적 대결의 드라마도, 동양적 수용의 공식도 아닌, 아직 이름 없는, 오직 물질로만 있는 제3의 위치로서. 나의 작업은 상실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을 짊어진다. 나는 상실에 주제로서 다가가지 않는다; 그것을 짊어진다. 나는 상실에 주제로서 다가가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통과해 사유한다 — 애도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묶여 있던 것에 더는 머무를 수 없을 때 일어나는 감각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로서. 그러한 단절 이후의 시간은 가장 먼저 지워진다 — 그리고 자신의 시간을 간직하는 물질은, 지워진 것이 짊어질 수 있는 자리가 된다. 짊어짐의 시간은 우리가 기능 이전의 우리를 다시 만지는 자리다 — 서로를 보살피고, 온기를 나누던 존재들. 나는 그 시간을, 그리고 우리 안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물질로 바꾼다.
나는 이 조각들로 다시 살을 만들고 싶었다 — 그것들을 채우고, 되살리고 싶었다. 나의 손은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느슨해지고 닳아 얇아진 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나는 그것들을 줍는다. 내가 줍는 것은 영원히 쥐고 있을 필요가 없다 — 다만 놓아줄 수 있을 때까지 짊어질 뿐이다.
짊어짐이 무엇인지는, 그것을 흉내 낸 영원 앞에서 오히려 또렷해진다. 언젠가 한 무덤가에서 나는 플라스틱 꽃을 보았다. 그것들은 시들지 않았고, 변하지 않았고, 영원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들을 자주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오래 버틴 꽃은 불충분해 보였다. 새 꽃이 더 정성처럼 느껴졌다. 갈아 치워진 꽃은 산업 폐기물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애도를 그저 소비하지 않는다 — 우리는 그것을 소비하면서 동시에 불러낸다. 산업적으로 영원화된 고통의 형태는 결코 해소되지 않고, 다만 갱신될 뿐이다.
우리의 애도를 가로지르는 것은 우리의 사랑 또한 가로지른다. 사랑이 좀처럼 자명한 것으로 도착하지 않는 곳에서 애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가 온 세계에서,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조용히 서서, 말해지지 않고도 인정받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증명으로, 주는 행위로 서둘러 간다. 우리는 이름 붙이기 전에 준다. 우리는 말하기 전에 기운다. 잃은 이와 남은 이 사이의 관계는, 그 문화 안에서 확신보다 아직 건네지지 않은 것으로 빚어진다: 아직 빚진 말들, 아직 빚진 몸짓들, 끝맺지 못한 다정함. 이 작업을 통해 되돌아오는 물음은 사랑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사랑이 도착할 시간을 갖지 못했을 때 무엇을 남기는가이다. 나의 작업은 이 물음을 물질에 되돌려준다 — 제때 말해지지 못한 것이 우리가 짊어지는 것일 때, 짊어짐의 시간은 무엇을 간직하는가? 천, 짚, 청동: 각각은 끝맺지 못한 문장이 아직 기다리는 자리다.
이 작업에서 내가 주의를 기울이는 슬픔은 단 하나의 몸짓의 슬픔이 아니라, 매일의 되돌아옴의 슬픔이다: 사랑이 영원을 붙들려 하면서도 자신을 녹이기에는 너무 작은 채로 남는 그 의례. 상실은 극적인 순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들 사이에서, 일상의 무표정한 흐름 속에서 일어난다 — 남은 자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왜 떠났는지 알지 못하는 세계 속에서. 애도는 완수되어야 할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해진 기한이 없고 단 하나의 원인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 그 자체와 함께 되돌아온다. 그리하여 나는 실패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느슨해지고 닳아 얇아진 것들 앞에서, 나는 다른 물음 안에 머문다.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그것들을 닮았는가? 짊어짐의 시간을 가질 때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어떤 감각과 마주하는가? 내가 다루는 재료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니다. 그것들은 물음이 머무는 자리다.
물질은 잊지 않는다. 한 신체가 만지고, 짊어지고, 입었던 것은 단지 쓰임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 그것은 감각을 간직한다. 휠 수 있는 것은 결코 부러지지 않는다. 나의 실천은 이 확신 위에 있다.
나는 긁고, 누르고, 비틀고, 다시 엮는다. 나는 찢고, 물들이고, 다시 잇는다. 그 노동은 지속의 시간을 갖는다; 각각의 행위는, 단절 이후의 시간 속에서 오직 안에서만 움직이는 감각에 물질을 부여한다. 나는 완결된 형태를 구하지 않는다. 나는 바로 그 경계 — 형태가 버틸지 무너질지 결정되는 — 를 내 작업의 조건으로 삼는다. 찢고, 채우고, 다시 잇는 이 과정은 자기 자신을 다시 구성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이 버팀의 재료들 곁에서, 나는 가장 가벼운 잔여물과도 작업한다: 민들레 씨앗, 자신을 던져 버리는 행위 속의 꽃. 짚과 거즈가 짊어짐의 시간을 기록한다면, 민들레는 짊어짐이 자신을 공기 속으로 놓아주는 순간을 기록한다. 둘 다 같은 경계에 속한다. 둘 다 사라질 줄 아는 몸이다 — 짚은 오랜 버팀을 통해, 씨앗은 조건 없이 자신을-실려-가게-함을 통해. 그것들은 상실의 상징이 아니라, 삶의 어떤 형식을 완성하는 존재들이다. 그것들이 건네는 것은 슬픔의 이미지가 아니라, 슬픔을 위한 형식이다.
나는 청동과도 작업한다. 이 재료는 유기적 물질의 변해 가는 시간을 또 다른 시간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나의 실천에 들어왔다 — 인간적인 항구성, 평범한 영원. 산업이 약속하는 불변이 아니라, 오직 짊어짐을 통해서만 다다르는 항구성. 짚과 거즈와 닳은 천이 무너지는 곳에서, 불과 긴 과정을 거쳐 나오는 청동은 부서지기 쉬운 것을 또 다른 형태로 붙들 수 있게 한다. 청동은 내가 여러 재료를 가로질러 같은 물음을 묻는 여러 방식 중 하나다 — 부서지기 쉬움 그 자체에 어떻게 무게를 줄 것인가.
전시장에서, 이 작업들은 마치 그곳으로 흘러들어온 듯 공간을 차지한다. 그것들은 기대고, 내려앉고, 침전물처럼 바닥에 모이거나, 거두어지기를 기다리듯 매달려 있다. 그것들은 그 무게나 얇음 속에, 자신을 낳은 자리바꿈을 간직한다 — 장소들 사이를 옮겨 다녔으나 결코 온전히 도착하지 못한 몸들, 천들, 물질들.
형태들은 막 무너질 듯한 긴장 상태를 유지한다. 나는 이것을 임계점(Critical Point)으로 생각한다: 완전히 무너지지도, 완전히 버텨지지도 않은 경계. 그것은 내가 포착하려는 형식적 조건이며, 자신을 잃어 가면서도 버티는 자의 실존적 조건이다.
그러나 임계점은 상태가 아니다 — 그것은 감각이다. 그것은 자신이 묶여 있던 것에 더는 머무를 수 없을 때 일어나는 상실의 부유하는 성질이다; 단절로, 해체로, 부서짐으로 나타나는 위태로움. 나는 그것을 가늘게 떨리는 풀들의 이미지를 통해 사유한다: 그것들은 연약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날카롭다; 가벼워 보이지만, 만지면 들어 올릴 수 없다. 임계점은 이 모순들이 동시에 같은 몸을 차지하는 자리다. 그것은 무너짐의 경계일 뿐 아니라 — 놓음의 경계이기도 하다: 꽉 쥐어졌던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은 채, 더 가벼워지는 법을 배우는 순간. 균열과 구멍은 보이지 않는 내적 투쟁이 표면으로 터져 나온 자리다; 씨앗의 가벼움은 그 같은 경계를 다른 쪽에서 본 것이다.
나는 이 경계에 대한 최종적 정의에 다다랐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임계점이라 이름 붙이지만, 그 이름이 그것을 온전히 붙든다고 믿지 않는다. 각각의 작업은 나를 같은 감각으로 데려가지만, 그때마다 그 감각이 옮겨 가 있음을 발견하게 한다; 떨리는 풀들은 매번 같은 풀이 아니다. 이름 붙임은 잠정적이다; 지속되는 것은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다.
나는 물질이 기억한다고 믿는다. 몸이 사라진 뒤에도, 감각은 재료 안에 남는다. 보는 이는 매끈한 표면 대신 닳은 겹들을 만나고, 즉각적인 자극 대신 머무름의 시간을 만난다.
내가 구하는 것은 버팀만이 아니다. 경계에서, 몸이 더는 붙들 수 없을 때, 다른 무언가가 시작된다 — 고요한 부유, 되돌아오는 숨. 형태를 묶고 있던 압력이 무게를 잃는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는 시간. 버티는 물질의 언어를 통해, 나는 단절 이후의 시간만이 아니라, 꽉 쥐어졌던 것이 마침내 스스로를 놓아주는 법을 배우는 순간 또한 기록한다. 나의 작업에서 상실은 마침내 단절과 내어줌을 함께 품는 움직임이다.
ARTIST STATEMENT
나는 이미 한 신체의 시간을 통과한 재료들과 작업한다 — 짚, 거즈, 찢고 물들인 천, 헌 옷, 종이, 그리고 주조한 청동. 그것들은 통과 중인 상태로 내게 온다. 끝나지도,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은 채로. 나는 그것들을 긁고, 비틀고, 다시 엮으며, 형태가 무너질지 버틸지 결정되는 경계에서 작업한다. 나는 이 경계를 임계점(Critical Point)이라 부른다. 나의 작업은 상실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을 짊어진다 — 꽉 쥐어졌던 것이 마침내 스스로를 놓아주는 법을 배울 때까지.
나는 오래전부터 어떤 물질들에 끌렸다: 투명하면서도 탄력 있는 것들; 찢어질 때까지 늘어나 그 안의 실들을 드러내는 것들; 느슨해지고 구멍 났지만 결코 버려지지 않은 것들. 몸을 닦는 데 쓰였던 빛바랜 천. 오래 입어 늘어난 소매. 한때 가까웠던 몸들의 옅은 마찰을 아직 간직한 옷 한 벌 — 나일론의 스침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았던 영혼들의 희미한 소리. 가느다란 빛이 닿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들. 그 안에서 나는 이름 붙일 수 없던 무언가를 알아보았다: 더는 곱씹을 분노도, 회한도, 원망도, 쓰라림도 없는 — 다만 끊임없이 무너지고 다시 생겨나는, 하루 전체의 평범한 무게로 두꺼운 부재만이 있었다. 이 재료들이 내게 왔을 때, 나는 그 안에서 익숙한 무언가를 알아보았다 — 그것들은 부재를 닮아 있었다. 그것들은 누군가가 남기고 간 것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누군가가 살았다는 증거로, 그리고 그 사람이 내 기억 속에서 계속 버티는 자리로 여기게 되었다. 몸이 사라진 뒤에도, 물질은 여전히 그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가 이 부재를 알아보는 눈은 한 곳에서 오지 않았다. 한국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살고 일하는 나의 이중적 위치는 이 작업에 우연히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그 구조적 조건이다. 두 곳 사이에 살며 나는 뜻밖의 것을 듣게 되었다. 한 사회가 자신의 죽은 자를 거두는 언어가, 국경과 무관하게 서로 닮아 있다는 것을. 연고 없는 죽음은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가장 적은 손길로 닫힌다. 그러니 나의 이중적 위치는 양식의 문제이기 이전에, 같은 적막을 양쪽에서 동시에 듣는 자리이기도 하다. 나의 실천 안에서 동아시아의 절제와 서구의 물질성은 서로의 알리바이가 되지 않는다. 건너감 자체가 나의 작업이 서 있는 자리다; 그것은 내가 쥠과 놓음 사이의 간격을 다루는 방식을 빚는다 — 서구적 대결의 드라마도, 동양적 수용의 공식도 아닌, 아직 이름 없는, 오직 물질로만 있는 제3의 위치로서. 나의 작업은 상실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을 짊어진다. 나는 상실에 주제로서 다가가지 않는다; 그것을 짊어진다. 나는 상실에 주제로서 다가가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통과해 사유한다 — 애도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묶여 있던 것에 더는 머무를 수 없을 때 일어나는 감각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로서. 그러한 단절 이후의 시간은 가장 먼저 지워진다 — 그리고 자신의 시간을 간직하는 물질은, 지워진 것이 짊어질 수 있는 자리가 된다. 짊어짐의 시간은 우리가 기능 이전의 우리를 다시 만지는 자리다 — 서로를 보살피고, 온기를 나누던 존재들. 나는 그 시간을, 그리고 우리 안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물질로 바꾼다.
나는 이 조각들로 다시 살을 만들고 싶었다 — 그것들을 채우고, 되살리고 싶었다. 나의 손은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느슨해지고 닳아 얇아진 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나는 그것들을 줍는다. 내가 줍는 것은 영원히 쥐고 있을 필요가 없다 — 다만 놓아줄 수 있을 때까지 짊어질 뿐이다.
짊어짐이 무엇인지는, 그것을 흉내 낸 영원 앞에서 오히려 또렷해진다. 언젠가 한 무덤가에서 나는 플라스틱 꽃을 보았다. 그것들은 시들지 않았고, 변하지 않았고, 영원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들을 자주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오래 버틴 꽃은 불충분해 보였다. 새 꽃이 더 정성처럼 느껴졌다. 갈아 치워진 꽃은 산업 폐기물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애도를 그저 소비하지 않는다 — 우리는 그것을 소비하면서 동시에 불러낸다. 산업적으로 영원화된 고통의 형태는 결코 해소되지 않고, 다만 갱신될 뿐이다.
우리의 애도를 가로지르는 것은 우리의 사랑 또한 가로지른다. 사랑이 좀처럼 자명한 것으로 도착하지 않는 곳에서 애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가 온 세계에서,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조용히 서서, 말해지지 않고도 인정받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증명으로, 주는 행위로 서둘러 간다. 우리는 이름 붙이기 전에 준다. 우리는 말하기 전에 기운다. 잃은 이와 남은 이 사이의 관계는, 그 문화 안에서 확신보다 아직 건네지지 않은 것으로 빚어진다: 아직 빚진 말들, 아직 빚진 몸짓들, 끝맺지 못한 다정함. 이 작업을 통해 되돌아오는 물음은 사랑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사랑이 도착할 시간을 갖지 못했을 때 무엇을 남기는가이다. 나의 작업은 이 물음을 물질에 되돌려준다 — 제때 말해지지 못한 것이 우리가 짊어지는 것일 때, 짊어짐의 시간은 무엇을 간직하는가? 천, 짚, 청동: 각각은 끝맺지 못한 문장이 아직 기다리는 자리다.
이 작업에서 내가 주의를 기울이는 슬픔은 단 하나의 몸짓의 슬픔이 아니라, 매일의 되돌아옴의 슬픔이다: 사랑이 영원을 붙들려 하면서도 자신을 녹이기에는 너무 작은 채로 남는 그 의례. 상실은 극적인 순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들 사이에서, 일상의 무표정한 흐름 속에서 일어난다 — 남은 자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왜 떠났는지 알지 못하는 세계 속에서. 애도는 완수되어야 할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해진 기한이 없고 단 하나의 원인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 그 자체와 함께 되돌아온다. 그리하여 나는 실패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느슨해지고 닳아 얇아진 것들 앞에서, 나는 다른 물음 안에 머문다.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그것들을 닮았는가? 짊어짐의 시간을 가질 때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어떤 감각과 마주하는가? 내가 다루는 재료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니다. 그것들은 물음이 머무는 자리다.
물질은 잊지 않는다. 한 신체가 만지고, 짊어지고, 입었던 것은 단지 쓰임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 그것은 감각을 간직한다. 휠 수 있는 것은 결코 부러지지 않는다. 나의 실천은 이 확신 위에 있다.
나는 긁고, 누르고, 비틀고, 다시 엮는다. 나는 찢고, 물들이고, 다시 잇는다. 그 노동은 지속의 시간을 갖는다; 각각의 행위는, 단절 이후의 시간 속에서 오직 안에서만 움직이는 감각에 물질을 부여한다. 나는 완결된 형태를 구하지 않는다. 나는 바로 그 경계 — 형태가 버틸지 무너질지 결정되는 — 를 내 작업의 조건으로 삼는다. 찢고, 채우고, 다시 잇는 이 과정은 자기 자신을 다시 구성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이 버팀의 재료들 곁에서, 나는 가장 가벼운 잔여물과도 작업한다: 민들레 씨앗, 자신을 던져 버리는 행위 속의 꽃. 짚과 거즈가 짊어짐의 시간을 기록한다면, 민들레는 짊어짐이 자신을 공기 속으로 놓아주는 순간을 기록한다. 둘 다 같은 경계에 속한다. 둘 다 사라질 줄 아는 몸이다 — 짚은 오랜 버팀을 통해, 씨앗은 조건 없이 자신을-실려-가게-함을 통해. 그것들은 상실의 상징이 아니라, 삶의 어떤 형식을 완성하는 존재들이다. 그것들이 건네는 것은 슬픔의 이미지가 아니라, 슬픔을 위한 형식이다.
나는 청동과도 작업한다. 이 재료는 유기적 물질의 변해 가는 시간을 또 다른 시간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나의 실천에 들어왔다 — 인간적인 항구성, 평범한 영원. 산업이 약속하는 불변이 아니라, 오직 짊어짐을 통해서만 다다르는 항구성. 짚과 거즈와 닳은 천이 무너지는 곳에서, 불과 긴 과정을 거쳐 나오는 청동은 부서지기 쉬운 것을 또 다른 형태로 붙들 수 있게 한다. 청동은 내가 여러 재료를 가로질러 같은 물음을 묻는 여러 방식 중 하나다 — 부서지기 쉬움 그 자체에 어떻게 무게를 줄 것인가.
전시장에서, 이 작업들은 마치 그곳으로 흘러들어온 듯 공간을 차지한다. 그것들은 기대고, 내려앉고, 침전물처럼 바닥에 모이거나, 거두어지기를 기다리듯 매달려 있다. 그것들은 그 무게나 얇음 속에, 자신을 낳은 자리바꿈을 간직한다 — 장소들 사이를 옮겨 다녔으나 결코 온전히 도착하지 못한 몸들, 천들, 물질들.
형태들은 막 무너질 듯한 긴장 상태를 유지한다. 나는 이것을 임계점(Critical Point)으로 생각한다: 완전히 무너지지도, 완전히 버텨지지도 않은 경계. 그것은 내가 포착하려는 형식적 조건이며, 자신을 잃어 가면서도 버티는 자의 실존적 조건이다.
그러나 임계점은 상태가 아니다 — 그것은 감각이다. 그것은 자신이 묶여 있던 것에 더는 머무를 수 없을 때 일어나는 상실의 부유하는 성질이다; 단절로, 해체로, 부서짐으로 나타나는 위태로움. 나는 그것을 가늘게 떨리는 풀들의 이미지를 통해 사유한다: 그것들은 연약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날카롭다; 가벼워 보이지만, 만지면 들어 올릴 수 없다. 임계점은 이 모순들이 동시에 같은 몸을 차지하는 자리다. 그것은 무너짐의 경계일 뿐 아니라 — 놓음의 경계이기도 하다: 꽉 쥐어졌던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은 채, 더 가벼워지는 법을 배우는 순간. 균열과 구멍은 보이지 않는 내적 투쟁이 표면으로 터져 나온 자리다; 씨앗의 가벼움은 그 같은 경계를 다른 쪽에서 본 것이다.
나는 이 경계에 대한 최종적 정의에 다다랐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임계점이라 이름 붙이지만, 그 이름이 그것을 온전히 붙든다고 믿지 않는다. 각각의 작업은 나를 같은 감각으로 데려가지만, 그때마다 그 감각이 옮겨 가 있음을 발견하게 한다; 떨리는 풀들은 매번 같은 풀이 아니다. 이름 붙임은 잠정적이다; 지속되는 것은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다.
나는 물질이 기억한다고 믿는다. 몸이 사라진 뒤에도, 감각은 재료 안에 남는다. 보는 이는 매끈한 표면 대신 닳은 겹들을 만나고, 즉각적인 자극 대신 머무름의 시간을 만난다.
내가 구하는 것은 버팀만이 아니다. 경계에서, 몸이 더는 붙들 수 없을 때, 다른 무언가가 시작된다 — 고요한 부유, 되돌아오는 숨. 형태를 묶고 있던 압력이 무게를 잃는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는 시간. 버티는 물질의 언어를 통해, 나는 단절 이후의 시간만이 아니라, 꽉 쥐어졌던 것이 마침내 스스로를 놓아주는 법을 배우는 순간 또한 기록한다. 나의 작업에서 상실은 마침내 단절과 내어줌을 함께 품는 움직임이다.
ARTIST STATEMENT
나는 이미 한 신체의 시간을 통과한 재료들과 작업한다 — 짚, 거즈, 찢고 물들인 천, 헌 옷, 종이, 그리고 주조한 청동. 그것들은 통과 중인 상태로 내게 온다. 끝나지도,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은 채로. 나는 그것들을 긁고, 비틀고, 다시 엮으며, 형태가 무너질지 버틸지 결정되는 경계에서 작업한다. 나는 이 경계를 임계점(Critical Point)이라 부른다. 나의 작업은 상실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을 짊어진다 — 꽉 쥐어졌던 것이 마침내 스스로를 놓아주는 법을 배울 때까지.
나는 오래전부터 어떤 물질들에 끌렸다: 투명하면서도 탄력 있는 것들; 찢어질 때까지 늘어나 그 안의 실들을 드러내는 것들; 느슨해지고 구멍 났지만 결코 버려지지 않은 것들. 몸을 닦는 데 쓰였던 빛바랜 천. 오래 입어 늘어난 소매. 한때 가까웠던 몸들의 옅은 마찰을 아직 간직한 옷 한 벌 — 나일론의 스침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았던 영혼들의 희미한 소리. 가느다란 빛이 닿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들. 그 안에서 나는 이름 붙일 수 없던 무언가를 알아보았다: 더는 곱씹을 분노도, 회한도, 원망도, 쓰라림도 없는 — 다만 끊임없이 무너지고 다시 생겨나는, 하루 전체의 평범한 무게로 두꺼운 부재만이 있었다. 이 재료들이 내게 왔을 때, 나는 그 안에서 익숙한 무언가를 알아보았다 — 그것들은 부재를 닮아 있었다. 그것들은 누군가가 남기고 간 것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누군가가 살았다는 증거로, 그리고 그 사람이 내 기억 속에서 계속 버티는 자리로 여기게 되었다. 몸이 사라진 뒤에도, 물질은 여전히 그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가 이 부재를 알아보는 눈은 한 곳에서 오지 않았다. 한국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살고 일하는 나의 이중적 위치는 이 작업에 우연히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그 구조적 조건이다. 두 곳 사이에 살며 나는 뜻밖의 것을 듣게 되었다. 한 사회가 자신의 죽은 자를 거두는 언어가, 국경과 무관하게 서로 닮아 있다는 것을. 연고 없는 죽음은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가장 적은 손길로 닫힌다. 그러니 나의 이중적 위치는 양식의 문제이기 이전에, 같은 적막을 양쪽에서 동시에 듣는 자리이기도 하다. 나의 실천 안에서 동아시아의 절제와 서구의 물질성은 서로의 알리바이가 되지 않는다. 건너감 자체가 나의 작업이 서 있는 자리다; 그것은 내가 쥠과 놓음 사이의 간격을 다루는 방식을 빚는다 — 서구적 대결의 드라마도, 동양적 수용의 공식도 아닌, 아직 이름 없는, 오직 물질로만 있는 제3의 위치로서. 나의 작업은 상실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을 짊어진다. 나는 상실에 주제로서 다가가지 않는다; 그것을 짊어진다. 나는 상실에 주제로서 다가가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통과해 사유한다 — 애도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묶여 있던 것에 더는 머무를 수 없을 때 일어나는 감각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로서. 그러한 단절 이후의 시간은 가장 먼저 지워진다 — 그리고 자신의 시간을 간직하는 물질은, 지워진 것이 짊어질 수 있는 자리가 된다. 짊어짐의 시간은 우리가 기능 이전의 우리를 다시 만지는 자리다 — 서로를 보살피고, 온기를 나누던 존재들. 나는 그 시간을, 그리고 우리 안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물질로 바꾼다.
나는 이 조각들로 다시 살을 만들고 싶었다 — 그것들을 채우고, 되살리고 싶었다. 나의 손은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느슨해지고 닳아 얇아진 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나는 그것들을 줍는다. 내가 줍는 것은 영원히 쥐고 있을 필요가 없다 — 다만 놓아줄 수 있을 때까지 짊어질 뿐이다.
짊어짐이 무엇인지는, 그것을 흉내 낸 영원 앞에서 오히려 또렷해진다. 언젠가 한 무덤가에서 나는 플라스틱 꽃을 보았다. 그것들은 시들지 않았고, 변하지 않았고, 영원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들을 자주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오래 버틴 꽃은 불충분해 보였다. 새 꽃이 더 정성처럼 느껴졌다. 갈아 치워진 꽃은 산업 폐기물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애도를 그저 소비하지 않는다 — 우리는 그것을 소비하면서 동시에 불러낸다. 산업적으로 영원화된 고통의 형태는 결코 해소되지 않고, 다만 갱신될 뿐이다.
우리의 애도를 가로지르는 것은 우리의 사랑 또한 가로지른다. 사랑이 좀처럼 자명한 것으로 도착하지 않는 곳에서 애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가 온 세계에서,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조용히 서서, 말해지지 않고도 인정받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증명으로, 주는 행위로 서둘러 간다. 우리는 이름 붙이기 전에 준다. 우리는 말하기 전에 기운다. 잃은 이와 남은 이 사이의 관계는, 그 문화 안에서 확신보다 아직 건네지지 않은 것으로 빚어진다: 아직 빚진 말들, 아직 빚진 몸짓들, 끝맺지 못한 다정함. 이 작업을 통해 되돌아오는 물음은 사랑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사랑이 도착할 시간을 갖지 못했을 때 무엇을 남기는가이다. 나의 작업은 이 물음을 물질에 되돌려준다 — 제때 말해지지 못한 것이 우리가 짊어지는 것일 때, 짊어짐의 시간은 무엇을 간직하는가? 천, 짚, 청동: 각각은 끝맺지 못한 문장이 아직 기다리는 자리다.
이 작업에서 내가 주의를 기울이는 슬픔은 단 하나의 몸짓의 슬픔이 아니라, 매일의 되돌아옴의 슬픔이다: 사랑이 영원을 붙들려 하면서도 자신을 녹이기에는 너무 작은 채로 남는 그 의례. 상실은 극적인 순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들 사이에서, 일상의 무표정한 흐름 속에서 일어난다 — 남은 자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왜 떠났는지 알지 못하는 세계 속에서. 애도는 완수되어야 할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해진 기한이 없고 단 하나의 원인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 그 자체와 함께 되돌아온다. 그리하여 나는 실패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느슨해지고 닳아 얇아진 것들 앞에서, 나는 다른 물음 안에 머문다.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그것들을 닮았는가? 짊어짐의 시간을 가질 때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어떤 감각과 마주하는가? 내가 다루는 재료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니다. 그것들은 물음이 머무는 자리다.
물질은 잊지 않는다. 한 신체가 만지고, 짊어지고, 입었던 것은 단지 쓰임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 그것은 감각을 간직한다. 휠 수 있는 것은 결코 부러지지 않는다. 나의 실천은 이 확신 위에 있다.
나는 긁고, 누르고, 비틀고, 다시 엮는다. 나는 찢고, 물들이고, 다시 잇는다. 그 노동은 지속의 시간을 갖는다; 각각의 행위는, 단절 이후의 시간 속에서 오직 안에서만 움직이는 감각에 물질을 부여한다. 나는 완결된 형태를 구하지 않는다. 나는 바로 그 경계 — 형태가 버틸지 무너질지 결정되는 — 를 내 작업의 조건으로 삼는다. 찢고, 채우고, 다시 잇는 이 과정은 자기 자신을 다시 구성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이 버팀의 재료들 곁에서, 나는 가장 가벼운 잔여물과도 작업한다: 민들레 씨앗, 자신을 던져 버리는 행위 속의 꽃. 짚과 거즈가 짊어짐의 시간을 기록한다면, 민들레는 짊어짐이 자신을 공기 속으로 놓아주는 순간을 기록한다. 둘 다 같은 경계에 속한다. 둘 다 사라질 줄 아는 몸이다 — 짚은 오랜 버팀을 통해, 씨앗은 조건 없이 자신을-실려-가게-함을 통해. 그것들은 상실의 상징이 아니라, 삶의 어떤 형식을 완성하는 존재들이다. 그것들이 건네는 것은 슬픔의 이미지가 아니라, 슬픔을 위한 형식이다.
나는 청동과도 작업한다. 이 재료는 유기적 물질의 변해 가는 시간을 또 다른 시간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나의 실천에 들어왔다 — 인간적인 항구성, 평범한 영원. 산업이 약속하는 불변이 아니라, 오직 짊어짐을 통해서만 다다르는 항구성. 짚과 거즈와 닳은 천이 무너지는 곳에서, 불과 긴 과정을 거쳐 나오는 청동은 부서지기 쉬운 것을 또 다른 형태로 붙들 수 있게 한다. 청동은 내가 여러 재료를 가로질러 같은 물음을 묻는 여러 방식 중 하나다 — 부서지기 쉬움 그 자체에 어떻게 무게를 줄 것인가.
전시장에서, 이 작업들은 마치 그곳으로 흘러들어온 듯 공간을 차지한다. 그것들은 기대고, 내려앉고, 침전물처럼 바닥에 모이거나, 거두어지기를 기다리듯 매달려 있다. 그것들은 그 무게나 얇음 속에, 자신을 낳은 자리바꿈을 간직한다 — 장소들 사이를 옮겨 다녔으나 결코 온전히 도착하지 못한 몸들, 천들, 물질들.
형태들은 막 무너질 듯한 긴장 상태를 유지한다. 나는 이것을 임계점(Critical Point)으로 생각한다: 완전히 무너지지도, 완전히 버텨지지도 않은 경계. 그것은 내가 포착하려는 형식적 조건이며, 자신을 잃어 가면서도 버티는 자의 실존적 조건이다.
그러나 임계점은 상태가 아니다 — 그것은 감각이다. 그것은 자신이 묶여 있던 것에 더는 머무를 수 없을 때 일어나는 상실의 부유하는 성질이다; 단절로, 해체로, 부서짐으로 나타나는 위태로움. 나는 그것을 가늘게 떨리는 풀들의 이미지를 통해 사유한다: 그것들은 연약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날카롭다; 가벼워 보이지만, 만지면 들어 올릴 수 없다. 임계점은 이 모순들이 동시에 같은 몸을 차지하는 자리다. 그것은 무너짐의 경계일 뿐 아니라 — 놓음의 경계이기도 하다: 꽉 쥐어졌던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은 채, 더 가벼워지는 법을 배우는 순간. 균열과 구멍은 보이지 않는 내적 투쟁이 표면으로 터져 나온 자리다; 씨앗의 가벼움은 그 같은 경계를 다른 쪽에서 본 것이다.
나는 이 경계에 대한 최종적 정의에 다다랐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임계점이라 이름 붙이지만, 그 이름이 그것을 온전히 붙든다고 믿지 않는다. 각각의 작업은 나를 같은 감각으로 데려가지만, 그때마다 그 감각이 옮겨 가 있음을 발견하게 한다; 떨리는 풀들은 매번 같은 풀이 아니다. 이름 붙임은 잠정적이다; 지속되는 것은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다.
나는 물질이 기억한다고 믿는다. 몸이 사라진 뒤에도, 감각은 재료 안에 남는다. 보는 이는 매끈한 표면 대신 닳은 겹들을 만나고, 즉각적인 자극 대신 머무름의 시간을 만난다.
내가 구하는 것은 버팀만이 아니다. 경계에서, 몸이 더는 붙들 수 없을 때, 다른 무언가가 시작된다 — 고요한 부유, 되돌아오는 숨. 형태를 묶고 있던 압력이 무게를 잃는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는 시간. 버티는 물질의 언어를 통해, 나는 단절 이후의 시간만이 아니라, 꽉 쥐어졌던 것이 마침내 스스로를 놓아주는 법을 배우는 순간 또한 기록한다. 나의 작업에서 상실은 마침내 단절과 내어줌을 함께 품는 움직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