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STATEMENT
내가 다루는 것은, 결국 재료의 집합이라기보다 통과의 집합에 가깝다: 사물이 지나가고 스며들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형태를 이루고, 사라짐을 향해 옅어지다가 다시 형태로 돌아온다. 밀짚, 거즈, 찢기고 물들인 천, 입던 옷, 민들레 씨, 주조된 청동은 이러한 통과가 눈에 보이게 되는 매개체다. 그것들은 작업의 주제가 아니라 그 계기다. 어떤 것들은 이미 한 몸의 시간을 통과해왔고, 다른 것들은 내가 그 시간 속으로 끌어들인다. 나는 각각을 형태가 무너질지 지속될지 결정해야 하는 문턱에서 붙든다 — 내가 임계점이라 부르는 그 지점에서. 그 통과를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어느 한쪽으로 정착하기 전에 눈여겨보게 하기 위해서다. 내 작업은 상실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행 중인 것들과 곁에 머물며, 그 너머에서 무엇을 지을 수 있을지 묻는다. 내가 만드는 것은 부재를 위한 기념비라기보다, 다시 설 수 있는 땅이다.
이 작업의 기원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나 자신의 상실이다. 애도를 함께 나눌 수 있는 무언가로 이해하기 전에, 나는 사적인 슬픔을 지니고 있었다. 그 슬픔이 자기 안에만 머물면, 숨 쉴 수 없는 무언가로 굳어진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 나의 시선은 바깥으로 옮겨갔다 — 내가 잃은 것으로부터 더 넓은, 공동의 땅으로, 내가 겪지 않은 상실을 지닌 사람들에게로. 그 움직임에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공감이다: 멀리서 불러온 감정이 아니라, 내가 직접 살아내지 않은 상실과 잠시나마 같은 시간을 함께 걷고자 하는 마음. 그 움직임은, 어떤 하나의 이미지보다도, 내 작업의 진짜 주제다. 이는 내가 내려놓을 수 없는 질문을 남긴다 — 사적인 슬픔은 자신이 겪지 않은 상실에 무엇을 빚지고 있는가? 지금으로서 내 답은, 그런 관심을 자기 안에만 두는 것 자체가 일종의 공모라는 것이다. 바깥으로 향하는 일은, 내 것이 아닌 것을 취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하는 일이다.
이 사유는 내가 자란 한국의 도시, 평택에서 처음 내게 찾아왔다. 그러나 평택은 내 작업의 주제가 아니라, 그 질문을 발견한 장소일 뿐이다. 언젠가 개발이 땅을 파헤쳤을 때, 연고 없는 유해가 드러났다. 그것들은 애도가 아니라 서류로 마무리되었다 — 이름도 유족도 없는 죽음이, 도시계획의 절차 안에서 순전히 행정적인 사안으로 처리되었다. 나를 멈춰 세운 것은 바로 그 장면이었다: 사회는 자신이 답하지 못한 죽은 이들을 어떻게 거두는가, 혹은 아예 거두지 않은 채로 마무리하는가? 그 이후로 그 지역의 어떤 무게와 공기가 내 작업 속에 스며들었다. 나는 그 장소를 무대처럼 재구성하지도,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의 발밑 땅이 흔들릴 때, 집이 하나의 부지로 바뀔 때, 한 공동체의 자세와 유대에 일어나는 일은 재료의 무게와 얇음 속으로 스며든다. 도시 외곽에는 대추리와 도두리가 있었다 — 농부들의 등이 거북이 등처럼 굽을 때까지 갯벌에서 손으로 일구어낸 농지, 자신의 지워짐에 맞선 오랜 저항 속에서 태어났다가 땅이 정리되며 흩어진 공동체. 그들 중 한 사람은 그 땅을 평생을 길러온 자식처럼 이야기했다 — 더는 필요 없어져서가 아니라, 강제가 그것을 요구했기에 내준 것이라고. 그들 역시 이 질문에 몸을 준다. 내 작업은 그 상실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름도 유족도 없이 마무리된 것을 다시 거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지, 그리고 그 땅을 새로이 짓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지를 묻는다.
나는 오랫동안 이행 중인 물질에 끌려왔다: 투명하면서도 탄력 있는 것들, 찢어질 때까지 늘어나 그 안의 실을 드러내는 것들, 느슨해지고 뚫리고 스며 나오는 것들. 그러나 동시에 모이고, 무게를 얻고, 붙들기 시작하는 것들도. 몸을 닦는 데 쓰이다 바랜 천. 오래 입어 늘어난 소매. 한때 가까웠던 몸들의 옅은 마찰을 아직 간직한 옷. 나는 이것들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때문에 고른다. 몸이 닿거나 입었던 것은 단순히 사용의 기록만이 아니다 — 한동안 그것은 그 닿음의 잔광을 여전히 지닌다, 아직 섬유를 떠나지 않았지만, 이미 떠나기 시작한 흔적. 민들레 씨는 스스로를 바람에 맡기고 흩어진다. 낡은 천은 자신의 실을 하나씩 내어준다. 청동은 유기적 시간을 더 느리고 단단한 형태로 끌어들인다. 이 움직임들 중 어떤 것은 놓음이고 어떤 것은 받아들임이다. 나를 붙드는 것은 그 통과 자체다 — 무언가가 여전히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는 그 지점.
최근 나는 이 매개물들이 서로를 붙들게 하고 있다. 실 하나가 오래된 표면을 관통해 지나간다. 단추 하나가 그 길이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와 매달린다. 낡은 소매 하나가 그 단추에 걸려 붙들려 있다 —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저 붙들려 있을 뿐, 떨어지기 바로 직전의 그 지점에서. 나를 붙드는 것은 붙듦이라는 그림이 아니라 그 메커니즘이다: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선이, 실재하고 완고한 무게를 짊어지도록 요구받는 것. 그 실은 둘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지 않는다; 그것을 지속시킬 뿐이다. 여기서 붙듦은 감정이라기보다 돌봄에 가깝다. 그것은 무언가를 떨어짐과 붙잡힘 사이의 문턱에 계속 붙들어두는, 느리고 위태로운 노동이다. 그 안에서 놓음과 받아들임은 하나의 동작으로 동시에 일어난다.
이 낡은 옷들, 한 몸의 시간을 통과해온 이 빈 껍질들은, 단순히 지난 사용의 기록이 아니다. 나는 카프카의 「변신」을 뒤집어 생각한다. 사람이 벌레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남는 것이 하나의 기능으로 축소되어 마침내 다 소진된 것의 빈 껍질이라는 점에서. 그 껍질은 한 사람의 죽음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노동하는 몸을 가리킨다 — 그 쓸모로만 측정되고, 소진되고, 버려지는, 개발이 땅을 파헤쳤을 때 서류로 마무리된 그 죽음과 같은 논리 아래 소비되는 몸. 나는 이 껍질에 감정을 불어넣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무엇으로 축소되었는지, 그리고 그 안에 여전히 남아 눈여겨보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볼 뿐이다.
이 부재를 알아보는 눈은 한 곳에서 오지 않는다. 한국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살고 일하며, 나는 우연이 아니라 작업의 구조적 조건이 되는 이중적 위치를 지니고 있다. 그 둘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나는 예상치 못한 것을 듣게 되었다: 한 사회가 자신의 죽은 이들을 거두는 언어가 국경을 넘어 서로 닮아 있다는 것. 유족 없는 죽음은, 여기서도 저기서도, 가장 적은 손길로 마무리된다. 동아시아적 절제와 서구적 물질성은 서로의 알리바이가 되지 않는다. 그 교차 자체가 내 작업이 서 있는 자리다 — 아직 이름은 없지만 물질만은 있는 제3의 위치. 그것은 내가 붙듦과 놓음 사이의 그 간극을 다루는 방식을 결정한다: 서구식의 대결의 드라마로도, 동양식의 수용의 공식으로도 아니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상실 일반이 아니라 상실이 남기고 가는 특정한 무언가다. 내가 온 문화에서,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말없이, 조용히 인정된 채로 서 있는 경우가 드물다. 그것은 증명으로, 주는 행위로 서둘러 옮겨간다. 우리는 말하기 전에 고치고, 이름 붙이기 전에 준다. 그래서 누군가 떠나면, 남는 것은 좀처럼 마무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미완의 다정함이다: 아직 빚진 말들, 건네지지 못한 몸짓, 도착할 시간이 없었던 문장. 그래서 내 작업을 통해 계속 돌아오는 질문은 사랑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이것이다 — 도착할 시간이 없었을 때, 사랑은 무엇을 남기고 가는가? 물질은 내가 그 질문으로 돌아가는 자리다. 낡은 천, 밀짚, 청동: 각각은 미완의 문장이 여전히 말해지기를 기다리는 자리가 된다. 때로는 몸 자체가 갈라져 일종의 문자처럼 되기도 한다, 균열, 흩어진 조각이 편지처럼 읽히기 시작하는 것. 그것은 지워짐 아래에서의 글쓰기다. 그것은 결코 완전히 판독 가능해지지 않는 의미의 압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말하려던 것이 결코 온전히 말해질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또한 쉬워진 애도를 불신한다. 언젠가 무덤가에서 조화를 보았다. 시들지도, 변하지도 않았다 — 영원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계속 갈아 끼웠다, 오래 버틴 것들은 부족해 보이고 새것이 더 진심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버려진 꽃들은 산업 폐기물이 된다. 우리는 그저 슬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동시에 소비하고 불러낸다, 그리고 산업적으로 영원해진 고통은 결코 해소되지 않고 그저 갱신될 뿐이다. 무상함에 대한 일반적인 시 역시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만들기 쉽고, 지나치기 쉬우며,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내 작업이 대신 요구하는 것은 시간, 그리고 하나의 방향이다. 나는 그것을 관람객이 감동했는지로 재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이 길어 올린 사람들과 땅에 신의를 지키는지로 잰다 — 그들의 상실을 전시하기보다 그들에게 무언가를 돌려주는지로. 무게와 들림 사이, 짊어진 흙 아래 굽은 농부의 등과, 전투기가 가로지르던 같은 하늘로 가느다란 대나무에 실려 올라가는 연 사이, 하나의 자세가 걸려 있다: 떠나가는 것 앞에서, 우리는 그것을 향해 돌아서는가 아니면 그로부터 접혀 물러나는가? 그늘진 이들은 도움이 닿지 않아서 손 내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손 내미는 것 자체의 두려움과 싸우고 있다. 그러니 이 작업은 무엇보다 그들에게 먼저 답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슬픔을 전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자리를 열어두려 한다 — 그들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자리, 흩어졌던 것이 잠시나마 다시 설 수 있는 자리.
임계점은 상태가 아니라 감각이다. 그것은 단절과 해체와 부서짐으로 나타나는 떠 있는 듯한 위태로움이며, 그 반대편에서, 단단히 붙들려 있던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더 가벼워지는 법을 배우는 순간이다. 나는 이것을 가늘게 떨리는 풀 — 연약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날카롭고, 가벼워 보이지만 들어 올릴 수 없는 — 을 통해 사유한다. 나는 이 문턱에 대한 최종적 정의를 주장하지 않는다. 작업 하나하나가 나를 같은 감각으로 되돌려놓지만, 그때마다 그것은 이미 옮겨가 있다. 이름 붙이기는 잠정적이다; 지속되는 것은 눈여겨보는 일이다. 임계점은, 내게, 더 이상 사물만의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땅의 조건이며, 한때 그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의 조건이다. 내가 작업이 남기기를 바라는 것은 떠난 이들을 위한 묘비가 아니라, 그 땅이 여전히 다시 설 수 있는 곳으로 거기 있다는 조용한 신호다.
갤러리 안에서 내 작품들은 기울고, 내려앉고, 바닥에 침전물처럼 모이거나, 아직 누군가 거두어가기를 기다리듯 매달려 있다, 그것들을 낳은 그 변위를 자신의 무게나 얇음 속에 지닌 채. 나는 확정된 형태를 추구하지 않는다. 나는 바로 그 문턱 자체를 — 하나의 형태가 붙들려 있을지 흩어질지 결정되는 그 지점을 — 내 작업의 조건으로 삼는다. 이 노동은, 흩어진 것으로부터 한 겹씩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젖은 천을 물들이고, 손가락 사이로 풀린 실을 다시 붙잡아 잇고, 찢긴 자리를 밀짚으로 채우는 일. 상실은, 결국, 단절과 순응 둘 다를 품은 하나의 움직임이다. 그 너머에는, 내가 이제 스스로에게 부여한 더 조용한 과제가 있다: 흩어진 것으로부터, 우리가 다시 함께 설 수 있는 자리를 짓는 일.
이진석
ARTIST STATEMENT
내가 다루는 것은, 결국 재료의 집합이라기보다 통과의 집합에 가깝다: 사물이 지나가고 스며들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형태를 이루고, 사라짐을 향해 옅어지다가 다시 형태로 돌아온다. 밀짚, 거즈, 찢기고 물들인 천, 입던 옷, 민들레 씨, 주조된 청동은 이러한 통과가 눈에 보이게 되는 매개체다. 그것들은 작업의 주제가 아니라 그 계기다. 어떤 것들은 이미 한 몸의 시간을 통과해왔고, 다른 것들은 내가 그 시간 속으로 끌어들인다. 나는 각각을 형태가 무너질지 지속될지 결정해야 하는 문턱에서 붙든다 — 내가 임계점이라 부르는 그 지점에서. 그 통과를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어느 한쪽으로 정착하기 전에 눈여겨보게 하기 위해서다. 내 작업은 상실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행 중인 것들과 곁에 머물며, 그 너머에서 무엇을 지을 수 있을지 묻는다. 내가 만드는 것은 부재를 위한 기념비라기보다, 다시 설 수 있는 땅이다.
이 작업의 기원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나 자신의 상실이다. 애도를 함께 나눌 수 있는 무언가로 이해하기 전에, 나는 사적인 슬픔을 지니고 있었다. 그 슬픔이 자기 안에만 머물면, 숨 쉴 수 없는 무언가로 굳어진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 나의 시선은 바깥으로 옮겨갔다 — 내가 잃은 것으로부터 더 넓은, 공동의 땅으로, 내가 겪지 않은 상실을 지닌 사람들에게로. 그 움직임에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공감이다: 멀리서 불러온 감정이 아니라, 내가 직접 살아내지 않은 상실과 잠시나마 같은 시간을 함께 걷고자 하는 마음. 그 움직임은, 어떤 하나의 이미지보다도, 내 작업의 진짜 주제다. 이는 내가 내려놓을 수 없는 질문을 남긴다 — 사적인 슬픔은 자신이 겪지 않은 상실에 무엇을 빚지고 있는가? 지금으로서 내 답은, 그런 관심을 자기 안에만 두는 것 자체가 일종의 공모라는 것이다. 바깥으로 향하는 일은, 내 것이 아닌 것을 취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하는 일이다.
이 사유는 내가 자란 한국의 도시, 평택에서 처음 내게 찾아왔다. 그러나 평택은 내 작업의 주제가 아니라, 그 질문을 발견한 장소일 뿐이다. 언젠가 개발이 땅을 파헤쳤을 때, 연고 없는 유해가 드러났다. 그것들은 애도가 아니라 서류로 마무리되었다 — 이름도 유족도 없는 죽음이, 도시계획의 절차 안에서 순전히 행정적인 사안으로 처리되었다. 나를 멈춰 세운 것은 바로 그 장면이었다: 사회는 자신이 답하지 못한 죽은 이들을 어떻게 거두는가, 혹은 아예 거두지 않은 채로 마무리하는가? 그 이후로 그 지역의 어떤 무게와 공기가 내 작업 속에 스며들었다. 나는 그 장소를 무대처럼 재구성하지도,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의 발밑 땅이 흔들릴 때, 집이 하나의 부지로 바뀔 때, 한 공동체의 자세와 유대에 일어나는 일은 재료의 무게와 얇음 속으로 스며든다. 도시 외곽에는 대추리와 도두리가 있었다 — 농부들의 등이 거북이 등처럼 굽을 때까지 갯벌에서 손으로 일구어낸 농지, 자신의 지워짐에 맞선 오랜 저항 속에서 태어났다가 땅이 정리되며 흩어진 공동체. 그들 중 한 사람은 그 땅을 평생을 길러온 자식처럼 이야기했다 — 더는 필요 없어져서가 아니라, 강제가 그것을 요구했기에 내준 것이라고. 그들 역시 이 질문에 몸을 준다. 내 작업은 그 상실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름도 유족도 없이 마무리된 것을 다시 거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지, 그리고 그 땅을 새로이 짓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지를 묻는다.
나는 오랫동안 이행 중인 물질에 끌려왔다: 투명하면서도 탄력 있는 것들, 찢어질 때까지 늘어나 그 안의 실을 드러내는 것들, 느슨해지고 뚫리고 스며 나오는 것들. 그러나 동시에 모이고, 무게를 얻고, 붙들기 시작하는 것들도. 몸을 닦는 데 쓰이다 바랜 천. 오래 입어 늘어난 소매. 한때 가까웠던 몸들의 옅은 마찰을 아직 간직한 옷. 나는 이것들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때문에 고른다. 몸이 닿거나 입었던 것은 단순히 사용의 기록만이 아니다 — 한동안 그것은 그 닿음의 잔광을 여전히 지닌다, 아직 섬유를 떠나지 않았지만, 이미 떠나기 시작한 흔적. 민들레 씨는 스스로를 바람에 맡기고 흩어진다. 낡은 천은 자신의 실을 하나씩 내어준다. 청동은 유기적 시간을 더 느리고 단단한 형태로 끌어들인다. 이 움직임들 중 어떤 것은 놓음이고 어떤 것은 받아들임이다. 나를 붙드는 것은 그 통과 자체다 — 무언가가 여전히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는 그 지점.
최근 나는 이 매개물들이 서로를 붙들게 하고 있다. 실 하나가 오래된 표면을 관통해 지나간다. 단추 하나가 그 길이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와 매달린다. 낡은 소매 하나가 그 단추에 걸려 붙들려 있다 —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저 붙들려 있을 뿐, 떨어지기 바로 직전의 그 지점에서. 나를 붙드는 것은 붙듦이라는 그림이 아니라 그 메커니즘이다: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선이, 실재하고 완고한 무게를 짊어지도록 요구받는 것. 그 실은 둘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지 않는다; 그것을 지속시킬 뿐이다. 여기서 붙듦은 감정이라기보다 돌봄에 가깝다. 그것은 무언가를 떨어짐과 붙잡힘 사이의 문턱에 계속 붙들어두는, 느리고 위태로운 노동이다. 그 안에서 놓음과 받아들임은 하나의 동작으로 동시에 일어난다.
이 낡은 옷들, 한 몸의 시간을 통과해온 이 빈 껍질들은, 단순히 지난 사용의 기록이 아니다. 나는 카프카의 「변신」을 뒤집어 생각한다. 사람이 벌레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남는 것이 하나의 기능으로 축소되어 마침내 다 소진된 것의 빈 껍질이라는 점에서. 그 껍질은 한 사람의 죽음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노동하는 몸을 가리킨다 — 그 쓸모로만 측정되고, 소진되고, 버려지는, 개발이 땅을 파헤쳤을 때 서류로 마무리된 그 죽음과 같은 논리 아래 소비되는 몸. 나는 이 껍질에 감정을 불어넣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무엇으로 축소되었는지, 그리고 그 안에 여전히 남아 눈여겨보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볼 뿐이다.
이 부재를 알아보는 눈은 한 곳에서 오지 않는다. 한국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살고 일하며, 나는 우연이 아니라 작업의 구조적 조건이 되는 이중적 위치를 지니고 있다. 그 둘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나는 예상치 못한 것을 듣게 되었다: 한 사회가 자신의 죽은 이들을 거두는 언어가 국경을 넘어 서로 닮아 있다는 것. 유족 없는 죽음은, 여기서도 저기서도, 가장 적은 손길로 마무리된다. 동아시아적 절제와 서구적 물질성은 서로의 알리바이가 되지 않는다. 그 교차 자체가 내 작업이 서 있는 자리다 — 아직 이름은 없지만 물질만은 있는 제3의 위치. 그것은 내가 붙듦과 놓음 사이의 그 간극을 다루는 방식을 결정한다: 서구식의 대결의 드라마로도, 동양식의 수용의 공식으로도 아니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상실 일반이 아니라 상실이 남기고 가는 특정한 무언가다. 내가 온 문화에서,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말없이, 조용히 인정된 채로 서 있는 경우가 드물다. 그것은 증명으로, 주는 행위로 서둘러 옮겨간다. 우리는 말하기 전에 고치고, 이름 붙이기 전에 준다. 그래서 누군가 떠나면, 남는 것은 좀처럼 마무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미완의 다정함이다: 아직 빚진 말들, 건네지지 못한 몸짓, 도착할 시간이 없었던 문장. 그래서 내 작업을 통해 계속 돌아오는 질문은 사랑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이것이다 — 도착할 시간이 없었을 때, 사랑은 무엇을 남기고 가는가? 물질은 내가 그 질문으로 돌아가는 자리다. 낡은 천, 밀짚, 청동: 각각은 미완의 문장이 여전히 말해지기를 기다리는 자리가 된다. 때로는 몸 자체가 갈라져 일종의 문자처럼 되기도 한다, 균열, 흩어진 조각이 편지처럼 읽히기 시작하는 것. 그것은 지워짐 아래에서의 글쓰기다. 그것은 결코 완전히 판독 가능해지지 않는 의미의 압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말하려던 것이 결코 온전히 말해질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또한 쉬워진 애도를 불신한다. 언젠가 무덤가에서 조화를 보았다. 시들지도, 변하지도 않았다 — 영원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계속 갈아 끼웠다, 오래 버틴 것들은 부족해 보이고 새것이 더 진심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버려진 꽃들은 산업 폐기물이 된다. 우리는 그저 슬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동시에 소비하고 불러낸다, 그리고 산업적으로 영원해진 고통은 결코 해소되지 않고 그저 갱신될 뿐이다. 무상함에 대한 일반적인 시 역시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만들기 쉽고, 지나치기 쉬우며,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내 작업이 대신 요구하는 것은 시간, 그리고 하나의 방향이다. 나는 그것을 관람객이 감동했는지로 재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이 길어 올린 사람들과 땅에 신의를 지키는지로 잰다 — 그들의 상실을 전시하기보다 그들에게 무언가를 돌려주는지로. 무게와 들림 사이, 짊어진 흙 아래 굽은 농부의 등과, 전투기가 가로지르던 같은 하늘로 가느다란 대나무에 실려 올라가는 연 사이, 하나의 자세가 걸려 있다: 떠나가는 것 앞에서, 우리는 그것을 향해 돌아서는가 아니면 그로부터 접혀 물러나는가? 그늘진 이들은 도움이 닿지 않아서 손 내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손 내미는 것 자체의 두려움과 싸우고 있다. 그러니 이 작업은 무엇보다 그들에게 먼저 답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슬픔을 전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자리를 열어두려 한다 — 그들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자리, 흩어졌던 것이 잠시나마 다시 설 수 있는 자리.
임계점은 상태가 아니라 감각이다. 그것은 단절과 해체와 부서짐으로 나타나는 떠 있는 듯한 위태로움이며, 그 반대편에서, 단단히 붙들려 있던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더 가벼워지는 법을 배우는 순간이다. 나는 이것을 가늘게 떨리는 풀 — 연약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날카롭고, 가벼워 보이지만 들어 올릴 수 없는 — 을 통해 사유한다. 나는 이 문턱에 대한 최종적 정의를 주장하지 않는다. 작업 하나하나가 나를 같은 감각으로 되돌려놓지만, 그때마다 그것은 이미 옮겨가 있다. 이름 붙이기는 잠정적이다; 지속되는 것은 눈여겨보는 일이다. 임계점은, 내게, 더 이상 사물만의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땅의 조건이며, 한때 그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의 조건이다. 내가 작업이 남기기를 바라는 것은 떠난 이들을 위한 묘비가 아니라, 그 땅이 여전히 다시 설 수 있는 곳으로 거기 있다는 조용한 신호다.
갤러리 안에서 내 작품들은 기울고, 내려앉고, 바닥에 침전물처럼 모이거나, 아직 누군가 거두어가기를 기다리듯 매달려 있다, 그것들을 낳은 그 변위를 자신의 무게나 얇음 속에 지닌 채. 나는 확정된 형태를 추구하지 않는다. 나는 바로 그 문턱 자체를 — 하나의 형태가 붙들려 있을지 흩어질지 결정되는 그 지점을 — 내 작업의 조건으로 삼는다. 이 노동은, 흩어진 것으로부터 한 겹씩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젖은 천을 물들이고, 손가락 사이로 풀린 실을 다시 붙잡아 잇고, 찢긴 자리를 밀짚으로 채우는 일. 상실은, 결국, 단절과 순응 둘 다를 품은 하나의 움직임이다. 그 너머에는, 내가 이제 스스로에게 부여한 더 조용한 과제가 있다: 흩어진 것으로부터, 우리가 다시 함께 설 수 있는 자리를 짓는 일.
이진석
ARTIST STATEMENT
내가 다루는 것은, 결국 재료의 집합이라기보다 통과의 집합에 가깝다: 사물이 지나가고 스며들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형태를 이루고, 사라짐을 향해 옅어지다가 다시 형태로 돌아온다. 밀짚, 거즈, 찢기고 물들인 천, 입던 옷, 민들레 씨, 주조된 청동은 이러한 통과가 눈에 보이게 되는 매개체다. 그것들은 작업의 주제가 아니라 그 계기다. 어떤 것들은 이미 한 몸의 시간을 통과해왔고, 다른 것들은 내가 그 시간 속으로 끌어들인다. 나는 각각을 형태가 무너질지 지속될지 결정해야 하는 문턱에서 붙든다 — 내가 임계점이라 부르는 그 지점에서. 그 통과를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어느 한쪽으로 정착하기 전에 눈여겨보게 하기 위해서다. 내 작업은 상실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행 중인 것들과 곁에 머물며, 그 너머에서 무엇을 지을 수 있을지 묻는다. 내가 만드는 것은 부재를 위한 기념비라기보다, 다시 설 수 있는 땅이다.
이 작업의 기원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나 자신의 상실이다. 애도를 함께 나눌 수 있는 무언가로 이해하기 전에, 나는 사적인 슬픔을 지니고 있었다. 그 슬픔이 자기 안에만 머물면, 숨 쉴 수 없는 무언가로 굳어진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 나의 시선은 바깥으로 옮겨갔다 — 내가 잃은 것으로부터 더 넓은, 공동의 땅으로, 내가 겪지 않은 상실을 지닌 사람들에게로. 그 움직임에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공감이다: 멀리서 불러온 감정이 아니라, 내가 직접 살아내지 않은 상실과 잠시나마 같은 시간을 함께 걷고자 하는 마음. 그 움직임은, 어떤 하나의 이미지보다도, 내 작업의 진짜 주제다. 이는 내가 내려놓을 수 없는 질문을 남긴다 — 사적인 슬픔은 자신이 겪지 않은 상실에 무엇을 빚지고 있는가? 지금으로서 내 답은, 그런 관심을 자기 안에만 두는 것 자체가 일종의 공모라는 것이다. 바깥으로 향하는 일은, 내 것이 아닌 것을 취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하는 일이다.
이 사유는 내가 자란 한국의 도시, 평택에서 처음 내게 찾아왔다. 그러나 평택은 내 작업의 주제가 아니라, 그 질문을 발견한 장소일 뿐이다. 언젠가 개발이 땅을 파헤쳤을 때, 연고 없는 유해가 드러났다. 그것들은 애도가 아니라 서류로 마무리되었다 — 이름도 유족도 없는 죽음이, 도시계획의 절차 안에서 순전히 행정적인 사안으로 처리되었다. 나를 멈춰 세운 것은 바로 그 장면이었다: 사회는 자신이 답하지 못한 죽은 이들을 어떻게 거두는가, 혹은 아예 거두지 않은 채로 마무리하는가? 그 이후로 그 지역의 어떤 무게와 공기가 내 작업 속에 스며들었다. 나는 그 장소를 무대처럼 재구성하지도,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의 발밑 땅이 흔들릴 때, 집이 하나의 부지로 바뀔 때, 한 공동체의 자세와 유대에 일어나는 일은 재료의 무게와 얇음 속으로 스며든다. 도시 외곽에는 대추리와 도두리가 있었다 — 농부들의 등이 거북이 등처럼 굽을 때까지 갯벌에서 손으로 일구어낸 농지, 자신의 지워짐에 맞선 오랜 저항 속에서 태어났다가 땅이 정리되며 흩어진 공동체. 그들 중 한 사람은 그 땅을 평생을 길러온 자식처럼 이야기했다 — 더는 필요 없어져서가 아니라, 강제가 그것을 요구했기에 내준 것이라고. 그들 역시 이 질문에 몸을 준다. 내 작업은 그 상실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름도 유족도 없이 마무리된 것을 다시 거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지, 그리고 그 땅을 새로이 짓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지를 묻는다.
나는 오랫동안 이행 중인 물질에 끌려왔다: 투명하면서도 탄력 있는 것들, 찢어질 때까지 늘어나 그 안의 실을 드러내는 것들, 느슨해지고 뚫리고 스며 나오는 것들. 그러나 동시에 모이고, 무게를 얻고, 붙들기 시작하는 것들도. 몸을 닦는 데 쓰이다 바랜 천. 오래 입어 늘어난 소매. 한때 가까웠던 몸들의 옅은 마찰을 아직 간직한 옷. 나는 이것들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때문에 고른다. 몸이 닿거나 입었던 것은 단순히 사용의 기록만이 아니다 — 한동안 그것은 그 닿음의 잔광을 여전히 지닌다, 아직 섬유를 떠나지 않았지만, 이미 떠나기 시작한 흔적. 민들레 씨는 스스로를 바람에 맡기고 흩어진다. 낡은 천은 자신의 실을 하나씩 내어준다. 청동은 유기적 시간을 더 느리고 단단한 형태로 끌어들인다. 이 움직임들 중 어떤 것은 놓음이고 어떤 것은 받아들임이다. 나를 붙드는 것은 그 통과 자체다 — 무언가가 여전히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는 그 지점.
최근 나는 이 매개물들이 서로를 붙들게 하고 있다. 실 하나가 오래된 표면을 관통해 지나간다. 단추 하나가 그 길이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와 매달린다. 낡은 소매 하나가 그 단추에 걸려 붙들려 있다 —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저 붙들려 있을 뿐, 떨어지기 바로 직전의 그 지점에서. 나를 붙드는 것은 붙듦이라는 그림이 아니라 그 메커니즘이다: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선이, 실재하고 완고한 무게를 짊어지도록 요구받는 것. 그 실은 둘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지 않는다; 그것을 지속시킬 뿐이다. 여기서 붙듦은 감정이라기보다 돌봄에 가깝다. 그것은 무언가를 떨어짐과 붙잡힘 사이의 문턱에 계속 붙들어두는, 느리고 위태로운 노동이다. 그 안에서 놓음과 받아들임은 하나의 동작으로 동시에 일어난다.
이 낡은 옷들, 한 몸의 시간을 통과해온 이 빈 껍질들은, 단순히 지난 사용의 기록이 아니다. 나는 카프카의 「변신」을 뒤집어 생각한다. 사람이 벌레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남는 것이 하나의 기능으로 축소되어 마침내 다 소진된 것의 빈 껍질이라는 점에서. 그 껍질은 한 사람의 죽음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노동하는 몸을 가리킨다 — 그 쓸모로만 측정되고, 소진되고, 버려지는, 개발이 땅을 파헤쳤을 때 서류로 마무리된 그 죽음과 같은 논리 아래 소비되는 몸. 나는 이 껍질에 감정을 불어넣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무엇으로 축소되었는지, 그리고 그 안에 여전히 남아 눈여겨보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볼 뿐이다.
이 부재를 알아보는 눈은 한 곳에서 오지 않는다. 한국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살고 일하며, 나는 우연이 아니라 작업의 구조적 조건이 되는 이중적 위치를 지니고 있다. 그 둘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나는 예상치 못한 것을 듣게 되었다: 한 사회가 자신의 죽은 이들을 거두는 언어가 국경을 넘어 서로 닮아 있다는 것. 유족 없는 죽음은, 여기서도 저기서도, 가장 적은 손길로 마무리된다. 동아시아적 절제와 서구적 물질성은 서로의 알리바이가 되지 않는다. 그 교차 자체가 내 작업이 서 있는 자리다 — 아직 이름은 없지만 물질만은 있는 제3의 위치. 그것은 내가 붙듦과 놓음 사이의 그 간극을 다루는 방식을 결정한다: 서구식의 대결의 드라마로도, 동양식의 수용의 공식으로도 아니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상실 일반이 아니라 상실이 남기고 가는 특정한 무언가다. 내가 온 문화에서,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말없이, 조용히 인정된 채로 서 있는 경우가 드물다. 그것은 증명으로, 주는 행위로 서둘러 옮겨간다. 우리는 말하기 전에 고치고, 이름 붙이기 전에 준다. 그래서 누군가 떠나면, 남는 것은 좀처럼 마무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미완의 다정함이다: 아직 빚진 말들, 건네지지 못한 몸짓, 도착할 시간이 없었던 문장. 그래서 내 작업을 통해 계속 돌아오는 질문은 사랑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이것이다 — 도착할 시간이 없었을 때, 사랑은 무엇을 남기고 가는가? 물질은 내가 그 질문으로 돌아가는 자리다. 낡은 천, 밀짚, 청동: 각각은 미완의 문장이 여전히 말해지기를 기다리는 자리가 된다. 때로는 몸 자체가 갈라져 일종의 문자처럼 되기도 한다, 균열, 흩어진 조각이 편지처럼 읽히기 시작하는 것. 그것은 지워짐 아래에서의 글쓰기다. 그것은 결코 완전히 판독 가능해지지 않는 의미의 압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말하려던 것이 결코 온전히 말해질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또한 쉬워진 애도를 불신한다. 언젠가 무덤가에서 조화를 보았다. 시들지도, 변하지도 않았다 — 영원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계속 갈아 끼웠다, 오래 버틴 것들은 부족해 보이고 새것이 더 진심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버려진 꽃들은 산업 폐기물이 된다. 우리는 그저 슬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동시에 소비하고 불러낸다, 그리고 산업적으로 영원해진 고통은 결코 해소되지 않고 그저 갱신될 뿐이다. 무상함에 대한 일반적인 시 역시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만들기 쉽고, 지나치기 쉬우며,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내 작업이 대신 요구하는 것은 시간, 그리고 하나의 방향이다. 나는 그것을 관람객이 감동했는지로 재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이 길어 올린 사람들과 땅에 신의를 지키는지로 잰다 — 그들의 상실을 전시하기보다 그들에게 무언가를 돌려주는지로. 무게와 들림 사이, 짊어진 흙 아래 굽은 농부의 등과, 전투기가 가로지르던 같은 하늘로 가느다란 대나무에 실려 올라가는 연 사이, 하나의 자세가 걸려 있다: 떠나가는 것 앞에서, 우리는 그것을 향해 돌아서는가 아니면 그로부터 접혀 물러나는가? 그늘진 이들은 도움이 닿지 않아서 손 내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손 내미는 것 자체의 두려움과 싸우고 있다. 그러니 이 작업은 무엇보다 그들에게 먼저 답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슬픔을 전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자리를 열어두려 한다 — 그들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자리, 흩어졌던 것이 잠시나마 다시 설 수 있는 자리.
임계점은 상태가 아니라 감각이다. 그것은 단절과 해체와 부서짐으로 나타나는 떠 있는 듯한 위태로움이며, 그 반대편에서, 단단히 붙들려 있던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더 가벼워지는 법을 배우는 순간이다. 나는 이것을 가늘게 떨리는 풀 — 연약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날카롭고, 가벼워 보이지만 들어 올릴 수 없는 — 을 통해 사유한다. 나는 이 문턱에 대한 최종적 정의를 주장하지 않는다. 작업 하나하나가 나를 같은 감각으로 되돌려놓지만, 그때마다 그것은 이미 옮겨가 있다. 이름 붙이기는 잠정적이다; 지속되는 것은 눈여겨보는 일이다. 임계점은, 내게, 더 이상 사물만의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땅의 조건이며, 한때 그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의 조건이다. 내가 작업이 남기기를 바라는 것은 떠난 이들을 위한 묘비가 아니라, 그 땅이 여전히 다시 설 수 있는 곳으로 거기 있다는 조용한 신호다.
갤러리 안에서 내 작품들은 기울고, 내려앉고, 바닥에 침전물처럼 모이거나, 아직 누군가 거두어가기를 기다리듯 매달려 있다, 그것들을 낳은 그 변위를 자신의 무게나 얇음 속에 지닌 채. 나는 확정된 형태를 추구하지 않는다. 나는 바로 그 문턱 자체를 — 하나의 형태가 붙들려 있을지 흩어질지 결정되는 그 지점을 — 내 작업의 조건으로 삼는다. 이 노동은, 흩어진 것으로부터 한 겹씩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젖은 천을 물들이고, 손가락 사이로 풀린 실을 다시 붙잡아 잇고, 찢긴 자리를 밀짚으로 채우는 일. 상실은, 결국, 단절과 순응 둘 다를 품은 하나의 움직임이다. 그 너머에는, 내가 이제 스스로에게 부여한 더 조용한 과제가 있다: 흩어진 것으로부터, 우리가 다시 함께 설 수 있는 자리를 짓는 일.
이진석